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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강화역사관 :: 체험학습 - 교육정보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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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강화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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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선사시대의 고인돌과 단군왕검께서 하늘에 제를 올리던 참성단 등 우리나라의 개국과 함께 하는 역사의 고장이며 고려시대에는 대몽항쟁 39년간의 도읍지로서 팔만대장경판각, 고려청자 제작, 금속활자 주조 등 민속문화의 황금기를 꽃 피워 온 산실입니다.
국난을 극복한 강인한 민족의 저력과 슬기로운 문화를 이어받은 강화는 한반도 역사문화의 축소판으로서 민족문화의 창달과 민족항쟁의 위업을 선양하고 호국정신의 함양을 위하여 1984년부터 5개년 사업으로 16억 7천만원을 투입하여 1988년 9월 강화역사관을 개관하였으며, 2001년 2월에는 기존 유물을 재배치하여 역사관을 새롭게 단장하여 개관하였다.



관람 시간  
※ 관람 소요 시간 : 50분 ~ 80분
※ 하절기(3월 1일 ~ 10월 31일) 9:00~18:00
    동절기(11월 1일 ~ 2월 28일) 9:00~17:00  

입장료  
일반:  개인-1300원 단체-900원  
청소년, 군인: 개인-700원  단체-600 원


찾아 가는 길


강화의 역사
강화군은 멀리 국조 단군성조의 개국과 그 역사를 함께하며 도서 특유의 지정학적 숙명으로 고금을 통해 왕실의 흥망성쇄가 곧 강화군의 역사를 이룬 것이라고 하겠다.

강화의 옛 이름은 갑비고차라 불리웠고, 고구려 시대에 이르러 군제를 두어 혈구군이라 칭하였으며, 신라때에 이르러 해구군으로 개칭하고 태수를 주재시켰다.

고려조에 이르러 태조 22년에 현으로 개편되고 이어 현재 지명인 강화군으로 불리웠다. 강화는 국가에 커다란 변란이 있을 때마다 제 2의 서울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외적이 침입할 때마다 조정에서는 강화로 천도함으로써 강화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강화는 39년간이나 사실상의 고려조의 왕도 역할을 하게 되었고,그 후에도 수차의 천도가 있었던 바 처음으로 강화에 천도한 것은 고려 23대 고종이었다. 그 해 대륙에서 득세한 신흥 세력인 몽고군이 송경, 지금의 개성에 침범하자, 당시의 권신 최우의 권유로 8월에 천도하였고, 그 다음 대의 원종도 강화에 머물러 전후 39년간 강화는 사실상 고려의 서울이었다.

그 뒤 25대 충렬왕은 재위 17년 12월에 또다시 거란군의 화를 입어 강화에 들어 왔다가 2년 후에야 겨우 송도로 환도하는 등, 강화는 양차에 걸쳐 고려 정치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고려는 고종때의 천도를 계기로 당시의 서울인 송도를 폐하고, 강화를 항구적인 도읍으로 삼으려 했던 모양이다.

고려 제23대 고종은 그해 8월(음 6월)에 송도에서 강화로 옮기면서 이령군으로 하여금 국도의 방어선인 내성의 축조공사를 일으키는 한편 궁전 구장과 사찰, 사직 등을 모두 당시의 왕도인 송도를 모방케 하고, 궁전 배후의 산에 송악이라는 산 이름까지 짓게 했던 것이다. 내성이 완공되자 익년 겨울에 외성을 쌓게 했고, 22년 9월에는 연안의 방비를 강화하였으며 24년 12월에는 외성 등을 또 중수했다.

그러나 몽고병의 세력이 날로 강화되어 강화도의 임시 왕도 방어가 위태롭게 되자 마니산 남쪽에 별궁인 흥왕이궁을 마련했고, 5월에는 가궁과 혈구사를 삼랑성에 창설하는 등 갖은 노력을 다 하였으나 끝내 강화는 몽고군에게 유린 되었고, 태자는 볼모가 되어 46년 6월에 몽고 내지로 납치되는 비극이 일어났던 것이다. 태자를 몽고로 보낸채 고종은 강화에서 천명을 다했고, 뒤를 이은 24대 원종도 강화를 서울로 이어받을 생각이었으나 몽고의 압력으로 이를 실현치 못하였다. 이로써 강화는 천도이후 39년간 고려의 국도가 된 셈이다.

그러나 강화서울의 수난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제 25대 충렬왕 10년에는 원나라의 반적, 흡단의 내구로 충렬왕이 일시 강화로 피했던 일이 있고, 고려 말의 공민왕 10년에는 또 홍두적의 난을 당해 강화천도가 논의된 일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태조, 정종, 태종의 3대왕이 일시적이나마 강화에 잠행한 일이 있고, 특히 태종은 강화에 도호부사를 두어 방어를 강화했으며, 14대 선조도 강화의 방어에 주력해 왜병을 근접치 못하게하여 남북간 적병의 연락 차단에 성공했던 일도 있다. 병자호란 때도 인조는 제 1차의 난에서 40일간을 강화로 몽진, 겨우 난을 피했었고, 남한산성에서 농성한지 45일만에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맺고 제 2차 내침 때에도 강화로의 몽진이 여의치 못하여 결국 남한산성으로 방향을 옮겼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조선17대 효종으로 하여금 성의 축조와 군량 보충을 강화케 했고, 19대 숙종은 인조시대부터의 유수에 진무사를 겸하게 했을 뿐 아니라 수비를 강화하기위한 진,보를 증설하고, 각 진에 돈을 설치하여 분담 수비하게 하였으며 문수산성의 축성 등 모든 방비를 강화시켰다.

강화도의 수난은 현대에 까지 미치는데 조선 고종3년의 프랑스 군함사건과 동 8년의 미국 군함사건, 동 12년의 일본 군함사건 등 조선 최후의 비극을 연출시킨 도화선이 되었던 곳이 곧 강화도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별도로서 또는 요새지로서의 중요한 임무를 지녀온 강화인만큼 당시의 왕궁을 중심한 고적과 유적이 전도에 산재해 있을 뿐 아니라, 도처에 승경이 있어 어디를 가나 왕도를 찾는 기분이 충만해 있다.

이상과 같은 윤곽 만으로도 다난한 역사를 지닌 강화를 인식하게 될것이고 옛곳을 한번 찾아 볼만한 흥미를 느끼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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